영화 ‘1987’이 엄청난 흥행과 함께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민주항쟁의 촉매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시작으로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까지
치열했던 1987년의 이야기가 2018년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울리고 있다.
배우 강동원의 열연으로 재조명된 이한열 열사의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짚어봤다.
영화를 보기 전이라면 더 재밌게 즐길 수 있고, 관람 후에도 알고 나면 흥미로운 몇 가지 사실들을 소개한다.
1. 이한열 열사는 당시 만 20살이었다
당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하며 촉망받는 대학생이었던 이한열 열사는 최루탄을 맞고 쓰러질 당시 만 20살이었다.
1966년생인 그는 시위 선봉장에 섰다가 최루탄 피격 후 27일 만에 사망한다.
2.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분노했다
당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 열사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경찰은 이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했고 이를 계기로 대학가에서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이한열 열사 역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분노해 시위에 나섰다.
3. 경찰이 쏜 최루탄을 뒤통수에 맞았다
시위 선봉대에 섰던 이한열 열사는 경찰이 쏜 최루탄에 뒤통수를 맞고 쓰러진다.
바로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곧 의식을 잃었고 뇌사 상태로 있다가 27일 만에 끝내 눈을 감았다.
4. 이한열 열사와 그를 부축해준 이종창씨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당시 같은 학교 도서관학과에 재학 중에던 이종창씨는 시위 도중 누군가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주저없이 달려가 부축했다.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이종창씨가 부축하는 모습은 사진에 담겨 후에 역사를 바꾸게 된다.
5. 차고있던 이한열 열사의 시계는 사라졌다.
최루탄을 맞고 쓰러질 당시 이한열 열사는 시계를 차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 이한열 열사가 차고 있던 시계가 감쪽같이 없어졌다.
당시 병원에서 검사를 위해 시계를 빼놓았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지금까지도 시계의 행방은 묘연하다.
6. 운동화는 아직 남아있다
이한열 열사가 당시 신었던 삼화고무의 타이거 운동화는 아직 남겨져 있다.
오래되어서 운동화 바닥이 모두 부서질 정도로 부식되었지만 미술품 복원가 김겸에 의해 복원되어 전시 중이다.
7. 피격 당시 모습을 찍은 건 로이터 통신 소속 우리나라 기자였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이종창씨가 부축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건 로이터 통신 특파원이었던 정태원 사진기자다.
이창성 전 중앙일보 기자가 로이터 통신에 사진 협조를 의뢰했다가 해당 사진을 발견해 중앙일보에 실리게 됐다.
8.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는 100만 명의 인파가 모였다
1987년 7월 9일 열린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는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전국적으로는 약 160만 명의 추모 인파가 모였으며 장례집회 선봉장에는 영화 ‘1987’에서 치안본부장 역을 맡은 배우 우현이 있었다.
9. 당시 경찰은 이한열 열사의 시신을 탈취하려 했다
이한열 열사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경찰은 병원에 들이닥쳐 시신을 탈취하려 했다.
하지만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던 학생들에 의해 시신을 탈취하는데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