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故 김군자 할머니는 향년 91세로 지난 해 생을 마감했다.
김 할머니는 고작 17살의 나이였던 1942년 중국 지린성의 훈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다.
김 할머니는 3년간 강제로 머물며 위안소의 치욕스럽고 살인적인 환경에 7차례나 자살 기도를 했다.
수차례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그때마다 구타를 당했다.
그 과정에서 고막이 터졌고, 후유증으로 평생을 한 쪽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다.
지난 해 수많은 관객을 울린 영화 ‘아이캔스피크’의 모티브가 바로 김 할머니다.
김 할머니는 나눔의 집 입소 뒤,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공식 사죄와 배상을 받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국내와 일본을 돌며 증언에 나섰고, 다른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와 함께 2007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을 고백하기도 했다.
인권보호 청문회에 증인으로 서며 ‘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되는데 공헌을 했다.
장시간의 비행과 시차, 낯선 음식 등 고된 상황에서도 오직 이 문제를 알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든 것을 견뎌냈다.
인권운동가로서 살겠다 다짐한 김 할머니는 아름다운재단 1호 기금 출연자이기도 하다.
김 할머니는 13살에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살아오며 힘겹게 모은 전 재산 5천만원을 기부했다.
어릴 적 8개월 야학에 다닌 것이 배움의 전부였던 김 할머니는 평생을 “배우지 못한 설움이 컸다”고 말했다.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이 배움의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터전을 닦아주고 싶었다.
김 할머니는 노점에서 번 돈과 정부에서 받은 생활지원금 등을 꾸준히 모아 돈이 모이는데로 기부를 했고, 총 2억 5천만원이라는 큰 돈을 기부했다.
이 후, 할머니의 이름을 딴 ‘김군자할머니기금’이 조성됐고 그 뜻에 동참하는 시민들이 기금에 돈을 보탰다.
할머니의 5천만원으로 시작한 ‘김군자할머니기금’은 다른 기부자들과 함께 11억원 규모로 커졌다.
이 기금을 통해 지난 해 7월을 기준으로 250여명의 학생들이 학비를 지원 받았다.
아름다운 재단뿐만 아니라 수원교구청, 나눔의 집 등에도 기부를 했고,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 돈을 모아 네팔 강진피해 구호 성금을 내는 등 자신의 장례식 비용 5백만원을 빼고는 모두 아낌없이 베풀었다.
김 할머니는 당신의 90세 생일에 “왜 내 삶은 이렇게 기구할까 한탄스러울 때가 많았는데, 돌아보니 내 가진 것을 모두 나누고 살아서 기쁘고 이제 미련도 후회도 없다”라는 말씀을 남겼다.
그리고 “인생이 별게 없는 것 같아. 그러니 여러분은 부디 재미있게 살아”라고 당부했다.
할머니의 이러한 행보는 ‘위대한 유산’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한편, 오늘 또 한 분의 피해자인 故 안점순 할머니가 90세로 별세했다.
올해에만 안 할머니를 포함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세분이 생을 마감했다.
이제 남아 있는 생존자는 29명뿐, 할머니들의 소원은 ‘죽기 전 일본의 사과 한 마디 듣는 것’이다.
하루 빨리 할머니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