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기념비적인 해다.
당시 평범한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거리로 나왔고, 군부 독재에 맞서 싸웠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 중에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故 이한열 열사도 있었다.
지난달 29일 JTBC 소셜스토리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1987년을 특별하게 보낸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을 공개했다.
이한열 열사와 중학교 동창인 배우 박철민도 당시 처참했던 광경을 떠올리며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명동성당에서 근무한 윤순녀씨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그런 황당한 일이 어디 있느냐”며 혀를 내둘렀다.
시민들 대부분은 경찰과 정부의 해명을 믿지 않았다.
1987년 중앙대학교 학생이었던 배우 박철민도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도 ‘딱’ 한 번 치고 싶었죠. 분명히 큰 고문, 강압적인 것에 의해 죽었는데 그렇지 않고 탁하니 억하고 죽었다고 하니 엄청난 비밀이 있고 감추려는 게 있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故 박종철 열사가 숨지고 3개월 뒤인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대통령 간선제’ 호헌조치를 내렸다.
시민들은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5월 18일 정의구현사제단은 미사가 끝날 때쯤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사건의 진실을 폭로하면서 시민들은 분노했고 거리로 나왔다.
1987년 6월 9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하루 앞두고 각 대학교에서 출정식이 열렸다.
연세대학교 정문 앞 2백여 명의 학생이 모였고, 그 중에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故 이한열 열사도 함께했다.
이들은 ‘4천만이 단결했다. 군부독재 각오하라’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다.
전경들은 학생들을 삼면으로 에워싸고 무자비하게 최루탄을 쐈다.
그 중 전경이 수평으로 쏜 최루탄 하나가 이한열 머리로 날아갔고, 그는 뇌사 상태에 빠졌다.
배우 박철민은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박철민은 “저는 이한열 열사하고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며 담담한 목소리로 사연을 전했다.
중학교 때 이한열 열사와 같은 반이었다는 박철민은 “한열이는 조금 더 내성적이고 신중한 아이였다”고 기억했다.
곧 박철민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내성적이고 신중했던 친구가 죽음을 무릅쓰고 거리로 나섰을 때 얼마나 큰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했을지 가슴 깊이 공감했다.
벅차는 감정을 애써 누른 박철민은 “한열이 죽음 앞에서 각오하고 좀 더 뜨겁게 좌우 생각하지 않고 나섰던 계기가 되지 않았나”라고 회상했다.
실제로 故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6월 민주항쟁의 불씨가 됐다.
시민들은 죄 없는 어린 학생에게 일어난 비극에 분노했고, 약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군부 독재를 타도했다.
민주주의를 향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열망은 같았다.
최루탄으로 시위대가 흩어지고 도망 다닐 때에는 건물 위에서 두루마리 휴지들이 떨어졌다.
학생들의 눈물을 닦으라고 보낸 시민들의 작은 손길이었다.
윤순녀씨는 “정말 모든 사람이 한 마음으로 모여 생긴 사건이라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약 20일간 이어졌고, 성난 민심 앞에 결국 전두환 군사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다.
한국 민주주의의 전환점을 맞이했던 역사적인 1987년.
그리고 시민들의 가슴에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지핀 이한열 열사는 1987년 7월 5일 결국 숨을 거뒀다.
박철민은 “불의에 맞설 때는 폭력의 두려움보다는 의로운 생각이 더 크지 않나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