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5 전쟁 당시 가장 잘 싸웠다고 평가되는 부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모두가 잠들어있던 고요한 새벽 4시에 북한은 폭풍이라는 작전명으로 선전포고 없이 무단으로 기습남침을 했꼬 발발한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3년 1개월 간 이어졌다.
당시 제일 잘 싸웠던 부대는 어디일까.
물론 모든 부대가 잘싸운 것은 맞다.
5. 수도기계화사단 – 맹호부대
– 전시에는 20사단 결전부대와 함께 역습하여 평양을 점령할 한국군의 넘버원 국가전력부대.
–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원산까지 진군하여 인민군 3,750명을 사.살하고 해산진과 두만강까지 진격했다. 향로봉, 설악산 인근에서 방어하여 끝까지 지켜낸 부대이다.
즉, 현재 설악산국립공원을 국민들에게 안겨준 부대.
4. 3사단 – 백골부대
– 본래 대구에 있었으나 전쟁 발발 후 서울로 긴급투입했다. 그 후 경북 영덕에 방어선을 만들었으나 인민군 5사단에게 패배하고 포항으로 내려오게 된다.
– 학도병과 3사단 행정병 60여명으로 포항시가지에서 인민군 1개 사단과 766유격대(특수부대)를 상대로 11시간동안 싸웠으나 학도병이 패배한다.
– 11시간 싸우는 동안 3사단은 전력을 포항외곽으로 산악지대로 빼고 전열 정비하여 재공격하여 인민군 12사단과 766 유격대를 격파한다.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동해안을 따라 진격한다.
– 위와 같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4위로 기록된 이유는 51년 5월 현리전투에서 패배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3사단과 9사단이 중공군에 포위되서 70%가 전멸하게 된다.
**** 일화) GP에서 장교1, 부사관1이 말뚝 수리를 하고 있던 때 북한군 총격으로 장교가 부상을 당한다. 당시 사단장이었던 박정인 장군이 북한군 GP가 평평해질 정도로 포격을 날려버린다.
한국군 평시작전통제권이 없었던 당시로 박정인 장군은 이 계기로 해임된다.
3. 해병대
– 당시 2개 대대뿐이었던 해병대. 북한국이 호남지역을 완전 장악 후 해병대는 마산신동고개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정찰온 북한군대대를 격파한다.
– 북한군 12사단이 통영과 거제를 점령했을 당시, 미 25사단장이 해병대에세 통영 탈환할 것을 명형하게 된다. 이에 해병대 1개 대대가 밤에 우리 함정을 타고 통영에 상륙하여 북한군 12사단을 이틀만에 격파하고 탈환에 성공한다.
그때 따라다닌 여자종군기자가 귀신잡는 해병이라고 해외언론에 쓰게 되었고 현재까지고 귀신잡는 해병이라고 불린다.
– 50년 9월 27일, 서울이 수복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부대가 해병대이다. 해병대는 전쟁이 끝날때까지 24개의 고지를 점령하였고 이 업적으로 이승만이 무적해병이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2. 1사단 – 전진부대
– 옹진반도, 개성에 주둔해있다가 전쟁 발발 기습받고 패퇴한다.
– 5월 17일 평양에 최초 입성, 그때 이승만이 계속해서 전진하라고 명령하였고 이 때문에 이름이 전진부대가 되었다. 전쟁 종결 직전 (7월 15일) 임진강 전투에서 1개 소대(약 30명)가 북한군 1개 연대(약 2,000명)를 깨버리며 휴전직전 개성지역을 내준다.
1. 6사단- 청성부대
– 무패, 불패의 부대&나라를 구한 부대라고 불린다.
– 원산에서 내려오던 북한군이 춘천과 양평쪽으로 우회하여 서울의 우측과 후방을 포위하려 했으나 당시 38선 바로 밑 춘천에 있던 6사단이 인민군 2사단의 40%를 박살낸다.
급히 북한군12사단이 증원되었으나 이 마저도 박살내버리는데, 이에 김일성은 열받아 2사,12사,2군단장 보직을 해임시켜버린다.
– 평양으로 진군한 청성부대, 압록강 초산지역까지 6사단이 진격했을 때 1개 연대가 중공군에 완전히 포위된다. 이때 이들은 각자 살아 황해도 개천에서 만나자는 작전과 함께 각개로 산능선을 타고 도망쳐 개천에서 다시 모이게 된다.
– 1개 연대와 중공군이 싸우는 사이 2개 연대가 우회하여 좌우로 중공군을 포위하였고 이에 중공군이 혼비백산하여 그대로 무작정 파로호까지 도망갔다.
지금의 강원도가 있는 것은 6사단의 공로가 아주 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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