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에 32명의 남성과 1명의 여성이 남게 된 사건이 재조명되고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5년 5월 24일, 어선 헤이스케 마루는 일본 해군에 징발돼 화물을 싣고 요코하마항을 출항했다.
배는 사이판 부근을 항해하다 미 해군 전투기에 발각돼 공격을 받았고 헤이스케 마루와 이케보노 마루라는 어선 두척은 그대로 가라앉았다.
배에 탄 승무원들과 에비스 마루의 생존자를 실은 카이호 마루 선원들은 근처 아나타한 섬이라는 섬에 불시착했다.
이로 인해 해군 10명과 민간인 선원 21명이 아나타한 섬에 남게 됐다.
이 섬에는 일본 기업이 야자수 농업을 했기 때문에 70명의 원주민이 생활하고 있었고 일본인은 농원 기술원 주임 1명과 그의 부하직원의 아내 히가 카즈코가 살고 있었다.
히가 카즈코의 남편은 파간 섬으로 여동생을 데리러 간 후 소식이 끊긴 상태였다.
섬의 식량은 금방 떨어졌고 31명의 남자들은 그룹을 나눠 농사와 수렵을 하기 시작했다.
섬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은 상륙한 미 해군이 데리고 가거나 탈출해 섬에는 일본인 남성 32명과 히가 카즈코 1명만 남게 됐다.
섬 생활이 점점 길어지면서 섬에 있는 유일한 여성인 히가 카즈코를 둘러싸고 남성들이 갈등하기 시작했다.
히가 카즈코는 농원 기술원 주임에게 보호를 요청했지만 오히려 주임은 그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1946년 헤이스케 마루의 선장은 피로로 급사했고, 1946년 8월 그들은 미군 폭격기의 잔해에서 권총 3정과 실탄 70발을 발견했다.
총기를 얻은 2명 중 한 명과 사이가 안 좋았던 남자가 사망했고, 이후 주임과 총을 가진 2명, 그리고 카즈코까지 4명이 동거를 시작했다.
이듬해인 1947년 가을, 총을 가진 2명 중 한 명이 나머지 한 명을 죽였다.
그러자 주임은 몸을 피했고, 총을 가진 2명 중 살아남은 한 명이 카즈코와 함께 지냈지만 이 남성 역시 어느날 사라졌다.
반년 후 주임 역시 사망했고, 카이호 마루 갑판장도 절벽에서 추락했으며 아케보노 마루 갑판장은 식중독으로, 총을 가지고 있던 남성은 익사했다.
사망한 사람 중 누가 살인으로 사망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사망 사건이 이어지자 생존자 중 가장 연장자였던 남성이 카즈코에게 선택권을 주고 전쟁을 끝내자는 의견을 내고 생존자들은 이에 동의했다.
1950년 6월 미 해군 함정이 섬에 다가왔을 때 카즈코는 홀로 투항해 섬에서 구출됐다.
섬에 남은 남자들은 종전 사실을 믿지 않아 계속 섬에 잔류하다 미 해군 함정이 다시 왔을 때 20명 모두 섬을 떠났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1953년 조셉 폰 스턴버그 감독은 네기시 아케미를 주연으로 ‘아나타한’ 이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소설 ‘도쿄섬’ 역시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쓰여진 작품이다.
히가 카즈코는 그 뒤 재혼해 살다 1972년 뇌종양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